뉴스위크 한국판 2009.06.17 삽질결과

귓속말 2009. 6. 12. 21:45

'나노식' 인도 경제의 힘
ARVIND SUBRAMANIAN

 국영은행이 전체 은행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인도 금융체제가 가장 좋은 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독성자산에 노출돼 심각한 위험에 처했던 인도 은행은 민영은행 한 곳뿐이었다. 국영은행들은 신중한 운영으로 그런 위험한 자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민영은행에서 자산을 빼내려는 예금자들의 안전한 도피처가 됐다.



오바마의 '잊혀진 전쟁'
FAREED ZAKARIA 국제판 편집장

 지난 몇 년 동안 국외로 탈출한 약 200만 명의 이카르인 중에서 귀국한 인원 소수에 불과하다(5%에도 못 미친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코소보와 비교해 보라. 그곳에서는 내전이 끝나자마자 해외로 도패했던 수백만 명이 즉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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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다수 관측통들, 특히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미군 내부 인사들은 이라크 점령의 기본 실책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이라크군 해체, 이라크 사회의 탈(脫) 바트당화, 국영기업의 폐쇄를 말한다. 미국은 그런 정책으로 정권 교체만이 아니라 '이라크'라는 국가 전체를 무너뜨려 대대적인 사회혁명을 부추겼다. 그 모든 일이 단 두 달 안에 일어났다.


위기의 유럽 좌파 정치권력 회복을 위한 조언
DENIS MACSHANE

 과거 좌파의 성공은 브란트와 곤잘레스 등 '좌파는 끝까지 좌파로 남아야 한다'는 일반 통념을 깨고 대기업가들과 손을 잡았던 정치인들 덕분에 가능했다. 이들 두 정치인은 모두 철저한 반미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정당에서 친나토주의자로 평가됐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또 당내의 권력층에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정당이 여전히 근로계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모인 직업정치인의 집단이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독일 정치의 '좌형좌'
STEFAN THEIL 기자

 독일에서 독성자산에 투자해 쪽박을 찬 쪽은 도이체방크 같은 '자본주의' 민간은행이 아니라 국영은행들이었다. 금융위기로 타격을 입은 계층도 빈곤층이나 저숙련 노도아가 아니라 바이에른 등 부자 도시에서 최강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수출기업들, 다시 말해 세계화의 승자들이었다. 이들은 현재 세계적인 수요 급감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12개월 동안 사라진 19만개의 일자리 중 절반은 엔지니어와 기술 전문직이었고, 이들 업종의 정리해고 비율은 전국 평균보다 7배나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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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제니퍼 매퀸 유럽 담당 애널리스트는 경기침체가 끝나면 미텔스탄트 기업들이 주축이 되어 독일 경제가 강하고 빠르게 회복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약 8160억 유로에 달하는 독일 은행의 독성 자산을 납세자에게 고스란히 떠넘겼다는 비난을 모면하는 데만 골몰하는 탓에 이번 선거에서 독일의 곪아터진 은행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위험성이 커졌다고 매퀸은 말했다.



갈림길에 선 홍콩
RANA FOROOHAR

 베이징 또한 중국 정부의 지월은 받고 있지만, 전통적 거래 중심지와 포괄적 금융도시로서의 위상을 고려해 봤을 대 상하이가 중국의 주요 상업 중심지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수년 전 부패 혐의로 정계에 칼바람이 몰아쳤을 때 정부내 상하이파가 세력을 잃게 되면서 정부가 상하이의 발전 방향을 지시하고 통제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



울프램알파가 온다!
BARRETT SHERIDAN 기자

 런던 출신의 울프램은 88년 복잡한 계산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매스매티카로 첫 홈런을 날렸다. 강력하면서도 사용이 용이한 인터페이스를 지닌 매스매티카는 즉시 업계 표준으로 자리를 굳히며 MS워드가 문서 작성에서 갖는 것과 같은 위상을 차지했다. 보잉 엔지니어들은 매스매티카 코드 몇 줄만 있으면 비행기 날개 위를 흐르는 기류를 계산할 수 있다. 200만 명의 사용자를 확보한 매스매티카는 울프램을 업청난 갑부로 만들었다(울프램알파와 매스매티카를 개발한 모기업 울프램리서치는 현재 비상장 기업으로 연간 22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다).


멘델스존, 나치 굴레를 벗다
MICHAEL LEVITIN 기자

 1829년 스무 살의 펠릭스 멘델스존은 독일 베를린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을 지휘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에는 어떤 작곡가가 사망하면 그의 곡이 더는 연주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작곡가가 죽으면 더는 연주되지 않았다. 하지만 뛰어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요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은 선배 음악가인 바흐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해 전통을 깨고 그의 곡을 연주했다. 당시 청중 가운데는 철학자 헤겔과 프러시아의 왕,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있었다.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이 곡이 연주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일은 독일 사회의 바흐 재발견 움직임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됐다.

 독일인들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바흐를 다시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만약 멘델스존이 아니었다면 그로부터 한 세기 뒤 나치가 바흐를 아리아인(비유대계 백인) 작곡가의 전형으로 받아들이고, '독일인 중의 독일인'이라고 치켜세우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잔인한 역사는 바흐를 세상에 다시 알리는 데 공헌한 멘델스존에게 합당한 대접을 하지 않았다. 제3제국(나치 독일)은 멘델스존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곡을 금지하고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을 말살했다.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되어
ANNE LADOUCEUR

 한국으로 오기 전이나 이미 와서 사는 외국인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한국에 관한 정보를 얻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한국생활에 관한 정보와 한국이 캐나다와 다른 점 등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해줄 정보를 모으려 애쓰는 이유다. 인터넷에 나도는 그런 정보는 대개 외국인의 시각에서 쓰이지 않았다. 동시에 심각할 정도로 낡은 정보가 많다.(1997년에도 그랬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에게 제공되는 이사 등의 기본 정보 서비스는 그간 매우 다양해졌지만 그만큼 비싸지기도 했다. 그 결과 소수의 외국인만이 그런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이번호는 솔직히 굵직한 정보는 없었다. 인도와 독일의 국영은행과 민간은행의 운명이 희비가 얻갈렸다는 점이 흥미로웠고(그리고 독일이 가지고 있는 독성자산의 규모도), 멘델스존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유렵좌파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는 짤막한 신문기사에는 잘 다뤄지지 않는 것 같아서 적어보았다.

 중국정부가 상하이를 아시아의 금융중심지로 밀고 있는 배경에 대한 내용도 꽤 의외였는데, 생각보다 중국은 지역별로 알력이 심한것 같다. 파벌도 의외로 잘 게 나누어진 듯한 인상을 중국관련 기사들로부터 자주 접하게 된다. 하기사 중국이란 나라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마지막 글은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인 안 라두쇠르씨의 글이다. 그녀는 K4E 컨설팅의 대표인데 K4E는 외국인에게 한국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이다. 그런 그녀가 외국인이 접하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접하기 힘들고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심지어 1997년에 비교했다.- 다소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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